'왓치맨'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1.10.07 [만화] 왓치맨 Watchmen
책, 만화, 영화2011. 10. 7. 01:49



저는 운명을 믿습니다. 그것도 매우 강하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미래는 정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정해져있는 미래를 알 수가 없기에 이렇게 살아간다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종교도 미신도, 심지어 일기예보 조차 믿지 않는데 어디서 저런 믿음이 생겼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딱 내가 원하던 그런 주제의 책이 나왔습니다. 그것도 만화로. Sci-Fi 분야에서 최고로 권위 있는 상인 휴고상(Hugo Award)을 받은 유일한 만화, 앨런 무어 Alan Moore 와 Dave Gibbons 의 왓치맨 Watchman 입니다.

너무 제 멋대로 책의 주제를 한정 지은 감이 매우 크지만, 이 책의 주제는 '미래는 정해져있으나, 다만 알 수 없을 뿐이다. 알 수 없기에 우리는 때론 분노하고, 때론 냉소하며, 때론 계획을 세워서 행동하고, 때론 관망하며 살 수 밖에 없다.' 입니다.


 
제목이 왓치맨이고 DC Comics에서 출간됬다고 해서  슈퍼맨, 스파이더맨 같은 슈퍼 히어로물을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아무도 슈퍼 히어로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그다지 사명감을 지니지도 않습니다. 다만 코스튬 플레이를 매우 좋아하는 사회 부적응자, 튀고 싶어 안달난 철없는 사람들, 유명세를 이용해 돈벌이를 하는 속물들 일 뿐입니다. 유일하게 능력을 지닌 자는 닥터 맨하튼인데, 슈퍼 히어로라기 보다는 신(神)에 가깝습니다.

<영화 왓치맨의 이미지 인데, 비주얼에서도 상당히 원작에 충실합니다. 왼쪽부터 코미디언, 실크 스펙터(로리), 닥터 맨하튼, 오지맨디아스(람세스의 영어식 표기), 나이트 아울(댄), 로어셰크>

닥터 맨하튼은 신(神)적인 능력을 가졌음에도 슈퍼 히어로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슈퍼맨 처럼 한사람 한사람을 구하러 땀복입고 하루종일 날아다니는 것이 슈퍼 히어로의 자세인데, 닥터 맨하튼은 한사람은 커녕, 인류 전체를(최소한 미국인 전체) 구하는데에도 굳이 스스로 이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비오는 날에 개미떼를 구하려고 발버둥 치지 않는 것 처럼, 요컨데 너무나 인간보다 우울한 존재인 나머지 굳이 인류를 구할 이유도 못느끼는 신인격자 입니다.

 닥터 맨하튼을 통해 미래가 정해져있음을 알 수 있고, 정해진 미래를 알지 못하는 코스튬을 입은자들은 각자의 감정으로 세상을 대합니다. 로어셰크는 세상에 분노하고, 코미디언은 세상을 냉소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실크 스펙터는 불평 불만 만을 털어놓고, 오지맨디아스는 철저한 계획을 통해 미래를 준비합니다. 

이중 가장 인상적인 등장인물은 이 이야기의 화자인 로어셰크인데, 책에 나오는 캐릭터 중 가장 감정적이고(주로 분노) 논리적이지 못한, 닥터 맨하튼과 가장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가장 많이 이용당하고, 가장 많이 돌아다니며, 여러 캐릭터로부터 무시당하는 캐릭터... 하지만 닥터 맨하튼의 최종 결정에 항변하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비록 그 결과가 달걀로 바위치기가 될 지언정. 어쩌면 우리 삶에 대한 덧없음을 그리고 무기력함을 온몸으로 표현합니다. 


죽기전 나이트 아울에게 말하는 마지막 대사가 로어셰크가 어떤 인물인지를 확실히 보여줍니다. "아뇨. 아마겟돈이 오더라도 안되요. 절대로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미래를 알 수 없는 우리는 그런 덧없는, 하찮은, 보잘것 없는 감정을 지닌채 살아가야하고, 닥터맨하튼 역시 결국 인류를 구하기로 결심합니다. 닥터 맨하튼이 감정을 받아들이고 결국 인류의 삶을(또는개인의 삶을) 추구하는 모습의 논리가 살짝 아쉽긴 하지만.. 어쩌면 그 부분은 독자가 각자 결론을 내려야만하는 부분일지도...

만화 곳곳에 섞여 있는 2~4 페이지짜리 기사, 논평 형식의 글을 통해서 부족한 스토리 배경을 부연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방대한 글의 양이(만화책 치고는 방대한) 흐름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읽고 난 뒤의 보상은 확실히 받을 것입니다. 꾸역 꾸역 읽어 나가는 재미가 있다고나 할까요..

시대에 뒤떨어지는 핵무기에 대한 공포, 냉전시대의 공포 분위기 등은 1987년 작품이라는 점은 감안하고 보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덧, 오늘 스티브 잡스의 부고를 듣고 하루종일 기분이 좋지 않네요... 잡스의 스탠포드 대학교 연설 동영상을 보고 또 보고 하고 있습니다. 중간에 멋진 문구가 나오네요. "다시 말씀드리자면 여러분은 앞을 내다보고 점을 연결 할 수는 없습니다. 나중에 회고하면서 연결할 수 있을 뿐이죠.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점들이 미래에 어떻게든 연결될 거라고 믿어야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버린적이 없었고 그게 제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잡스의 연설은 다시 들어도 감동적입니다. 위에 제가 쓴 글을 바꿔야 겠습니다.

"
미래는 정해져있으나, 다만 알 수 없을 뿐이다. 알 수 없기에 우리는 때론 분노하고, 때론 냉소하며, 때론 계획을 세워서 행동하고, 때론 관망하며 살 수 밖에 없지만, 어떤 사람은 삶의 순간 순간이 어떻게든 연결될 거라고 믿고 살아간다." 라고요.



Watchmen 1
국내도서>만화
저자 : 앨런 무어(Alan Moore) / 정지욱역
출판 : 시공사(만화) 2008.05.25
상세보기
 
Watchmen 2
국내도서>만화
저자 : 앨런 무어(Alan Moore) / 정지욱역
출판 : 시공사(만화) 2008.05.25
상세보기
Posted by 구구주녀